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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2013-'총체적난 극'

총체적난 극의 다섯번째 씬

총체적난 극의 다섯 번째 씬




승동이 빈 화면에 천천히 긴 막대기를 그려나가기 시작합니다. 곧 막대기를 잡고 있는 손이 그려지고 그 뒤로 무표정한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냅니다. 마치 항아리 속의 코브라를 호명하는 인도의 기인처럼 신비로운 기운의 인물의 정체는 무대 대신 화면으로 등장합니다. 코러스가 마련한 무대 가운데 의자는 객석을 응시하고, 관객들은 승동의 그림이 사라지고 서서히 등장하는 새로운 레이어의 화면에 긴장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클라리넷만 만지작 거리다 느린 속도로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다운중후군의 석원입니다. 석원의 손과 클라리넷의 텐션은 낯 선 남녀의 첫 만남처럼 긴장감과 위태로움, 안도감을 오고 갑니다. 떨어지지도 붙어있지도 않은 이 접촉면들은 물질적인 역학관계로는 읽을 수 없는 비과학적인 접촉면들입니다. 클라리넷을 잡으려는 의지도 힘도 없어 보이지만 석원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클라리넷은 석원의 손과 알 수 없는 자장으로 연결되어 보입니다. 석원은 무표정하고 나른하게 클라리넷을 만지작거리다가 클라리넷을 입으로 가져갑니다. 호흡을 살짝 정리하고, 클라리넷이 입에서 붙었다... 떨어졌다....붙었다...떨어졌다,,,,를 반복합니다. 이미 어떤 곡을 몇 곡 연주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지났지만 석원의 클라리넷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대신 존케이지의 연주처럼 관객들의 집중된 긴장감속의 소음들이 극을 점유해 나갑니다. 화면 속 석원은 무언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표정입니다. 마치 볼트를 조였다 풀었다하는 기계공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클라리넷을 입에 대고 미세하게 호흡을 할까 말까를 망설입니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주 긴 통로를 따라 여행한 그 첫 숨이 드디어 클라리넷을 통과하며 관객들이 들을 수 있는 파장이 되어 공간을 가로지릅니다. 어쩌면 석원의 연주를 관객이 들을 수 있는 조건은 보편적으로 조직화 되어 있는 인내의 예각에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흔한 가스펠의 멜로디가 종교적 권위 밖에서도 새롭게 신비감을 조성하는 순간입니다. 관객들의 낮은 탄성들은 멜로디를 앞서가는 조바심을 증거 합니다. 이 다른 신경세포간 운동들의 차이가 오히려 엇박의 몸동작을 만들어 내고 이 몸동작들은 석원의 호흡과 반응 손의 미세한 속도차에 따른 춤이 됩니다. 연주보다 강력한 연주자의 춤입니다. 화면 속 석원이 만들어 내는 입체적 상황 옆으로 또 다른 화면이 분할되며 석원의 어린시절이 등장합니다. 두 화면 속의 석원의 나이 차이는 현재의 석원의 소리를 소거하고 어린시절 마림바 연주소리로 이어집니다. 정상의 범주, 보편적 범주 안에서의 석원은 전문 연주자의 모습입니다. 석원의 마림바 연주는 자전거를 타는 석원의 모습으로, 수영을 하는 석원의 모습으로 갔다가 군악대에서 연주하는 석원의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진짜 사나이를 연주하는 석원의 모습과 감동하는 석원 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연주가 끝나고 잠시 여백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클라리넷을 만지작 거리는 현재의 석원 모습이 느리게 페이드아웃 되면서 무대 한쪽에서 코러스 조강이 배우와 석원이 등장합니다. 석원은 오늘 말끔한 검정색 정장 차림입니다. 무대 가운데서 관객석만을 응시하고 있던 빈 의자의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조강이 배우는 검정색 가방 속에서 클라리넷 조각들을 꺼내어 석원에게 줍니다. 석원은 클라리넷 조각들을 받아 천천히 조립하기 시작합니다. 두 개의 조각들을 잡고 서서히 이가 맞게 돌립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석원이 그랬듯이, 화면 속 풍경이 무대 위에서 재현 됩니다. 클라리넷 조각들이 조여졌다 풀어졌다 반복됩니다. 석원은 미세한 음직임으로 무언가 말을 하는 듯 보입니다. 손의 악력이 모여지면서 입모양이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역시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 내며 자신만의 주문을 불러 내는 듯 보입니다. 클라리넷 조각이 맞추어 지면서 차츰 클라리넷 모양새가 갖추어 갑니다. 많은 관객들이 숨죽여 집중하면서 클라리넷 조립이 완성되기를 기다립니다. 석원은 드디어 마지막 조각을 맞추는 순간에 있습니다. 작은 마우스 피스 조립은 클라리넷 조립의 절정인 듯 보입니다. 예민하게 각도를 수정해가며 조립하기를 여러번, 석원은 아무렇지 않게 클라리넷을 다시 분해 하기 시작 합니다. 중간 중간 어두운 관객석을 무표정하게 돌아보며 천천히 클라리넷을 분해하여 가방에 넣습니다. 석원은 조강이 배우와 몇 번의 눈길을 주고 받다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무대 밖으로 걸어나갑니다. 석원의 연주는 끝이 났습니다. 석원이 떠난 자리에 무어라 정의 할 수 없는 박수가 흘러 나옵니다. 석원은 지금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