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24 아방과후르드
조급
결국 예술은, 예술교육은 삶을 성찰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유할 수 있다는 초심은 어디로 갔을까? 짜여진 시간표는 만남의 관성을 만들고 그 관성은 구성원 모두에게 느슨한 구속력을 만든다. 이 느슨한 구속력을 예술교육에 있어서 자율적 선택과 판단이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긍정적인 신호라고 주장해 왔던가? 하지만 실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이 느슨한 구속력은 자율과 긍정의 신호에서 불안과 조급을 전파한다. 우리는 이 조급 앞에서 단결과 성실, 성과라는 제도적 안정감을 혹 원하고 있지는 않았나? 아방과후르드는 이제 갓 삼부능선도 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뇌의 기능
일본의 대표 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는 그의 저서 ‘예술인류학’에서 신화와 신화적 사고의 의미를 일반적 논리에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비틀림’을 가진 특유의 논리로 이야기 한다. 이는 무시간적이며 모든 것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는 ‘대칭성의 논리’와 , 모든 것을 이야기의 질서에 따라 배열하여 말할 수 있는 논리력의 결합체가 곧 신화라고 이야기 하는데 원초적 야생이 살아 있는 감성적 영역으로써의 ‘대칭성의 논리’와 합리적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비대칭성 논리’를 대등한 입장에서 바라보며 이 상반된 입장이 균형 감 있게 조화를 이루는 중요성으로 동시대의 역할을 주문한다. 실제로 이는 산업화 이 후 과학 문명이 고도로 성장 발전을 이룬 현대인들의 두뇌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그 효용성과 가치가 절하된 ‘우뇌’의 기능회복과 그 잠재적 가치의 부활에 대한 주문인 동시에 시각 중심적이며 이성 중심적인 상식의 관성에 대한 경계의 의미로 풀이 할 수 있다. 때문에 신화가 갖고 있는 ‘비틀림’의 논리는 결국 동시대 예술계에서 감성의 회복, 감성의 번역, 새로운 프레임의 감성 공학적 실험으로 확장되며 동시대 드로잉은 전통적인 제의와 기복적 감성의 떨림에서부터 새로운 매체를 직관적으로 해석하며 그 기능을 해체하고, 불확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영토를 개척하는 탐험가의 심정으로 감성의 스펙트럼을 개간한다. 그런데 이 감성의 스펙트럼은 이성의 바깥에서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영역을 투과해서 존재하기도 하며 스며들어 있기도 하고 입체적으로 병치되어 있기도 하여서 좀처럼 그 범주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이른바 감성의 장치들이 개입되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현되며 의도적으로 이성을 놓아 버리는 경우도 발행하고 추적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감성의 함정과 덫을 놓기도 하며, 작업의 수행과정에서 부조리함과 결합하여 감성의 길을 잃게도 만들고, 타임머신처럼 시 공간을 분절시켜 이성적 해석과 접근이 불가능한 초현실적 경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감성활성
1981년 노벨 생리, 의학상 수상자인 인지과학의 대부 로저 스페리(R. Sperry)는 좌뇌 와 우뇌의 기능분화설과 그 상호작용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감성을 활성화하기 위한 신호로써 신체를 활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역설한다. 또한 동시대에는 감성지수를 활용하기 위하여 약물과 알콜에 자신의 감성을 의지하는 예술가들의 토픽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경우의 원인은 결국 감성의 회복과 감성을 어떻게 자신의 예술에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적 욕망에서 시작되는데 긴장을 풀고 신체를 움직여 이성을 무장해제 시키는 방식으로 감성을 다독이며 그 작동 장치를 증폭시키는 방식이 긍정적인 감성 활성의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청각적 관찰
결국 청각적 관찰은 시각적 관성으로 전체화된 상식에 일조하는 사고의 방식을 개별적이고 주관적으로 쪼개는 신호로 작동한다. 또한 즉각적이고 기호적인 사고의 반사력을 무력화 시키고 사유를 더듬어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만든다. 청각적 관찰은 관성과 맞서야 하는 적극적 의지도 반영되어야 한다. 기차소리 강아지소리 비소리로 추정되는 사운드 앞에서 이 사운드들을 감성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절대 진리를 코 앞에서 부정해야 하는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결국 일련의 상황과 사건들이 상호 작용을 일으켜 결국 차이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청각적 관찰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들은 던지지 않는다. 다만 사운드을 보고 자기나름대로의 해석을 달고 그 해석에 대한 시각적 주석을 달아 놓을 뿐. 이렇게 발생하게 된 개인의 차이가 개인의 미적 취향과 태도를 낳고 그 태도의 개별성이 의미화 되는 순간 다양한 가치가 병렬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뿐인가?
존중
목적성은 대부분 결과를 예측하거나 추정한다. 그것도 긍정적인 프로세스로. 때문에 발생되는 현상이 조급임은 당연한 일이다. 이 목적성과 예측 조급의 관계는 창의력이 끼어들 수 없는 그물망이다. 때문에 목적성을 내려 놓거나 추청을 피할 방법, 예술적 상상력을 개입시킬 수 있는 이완된 조건들이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인식은 하지만 실행은 늘 불만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문제의식이 아직 중요하다는 것을 다짐할 수 있는 것. 감각적 관찰의 레이어가 쌓일수록 프로젝트 커뮤니티의 접촉면들이 넓어지고 이 넒어진 접촉의 영토가 분명 어떤 차이의 토양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은 서로를 존중하고 참고 기다릴 지혜가 필요한 시기이다.
비판의 칼날
은 스스로에게 우리에게 프로젝트 모든 구성원에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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