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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2013-'총체적난 극'

11월 20일, 총체적난 극의 두번째 시선

 

'후미코 컴퍼니',2008년 일본 하나아트센터에서 김월식 작가와 후미코상의 공동작업,

 

1120일 총체적난 극

 

제 생각에 장애인은... 장애인입니다. ( 웃음 )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다르다, 기원은 같은 인간인데 종이 달라진 거죠. 종이 다르고, 따라서 언어가 다르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다릅니다. 예를 들면 60년대 미국 흑인 운동 당시 멜컴 엑스처럼 과격한 쪽에서는 아예 미국의 한 지역에 흑인만의 자치정부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했죠. 굳이 우리 흑인이 너희 백인들과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너희 백인들이 불편한 만큼 우리도 불편하다는 거였죠. 장애인이 어떤 행동을 하는데 그 사람이 장애인이 아니라는 것을 빼고 이해할 수 가 있을까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빼지 말고 봐달라? 오히려 넣어서 봐달라는 겁니다. ....장애를 인정하고 장애를 드러낼 때 정말 훌륭한 예술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술작품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자시 자신 안에서 오는 것이고,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코어(core)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흉내 내기로는 아무것도 안 되죠. 제가 같은 장애인이라도 지체장애를 가진 장애인을 이해하지 못해요. 우리끼리는 또 서로 종이 다르잖아요? 우주의 빛은 내는 별은 하나도 없듯이, 결국 나만의 아이덴티티, 나만의 것을 가지고 소통할 때 진정한 그 무엇이 될 것입니다. ..... 장애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투영하면 처음에는 표도 안 팔리고 힘들겠지만, 시간이 가면 삶들이 장애라는 요소를 즐길 수 있게 되겠죠. 그렇게 되기 위해서라도 장애인만의 고유한 컬러가 확실히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가령 원숭이 무리에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아무리 털이 많이 났다고 해도 그가 인간이라는 점은 모든 것을 갈라 놓는 절대적인 팩트가 됩니다. 그렇게 중요한 팩트이기 때문에 장애가 감춰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것입니다.

 

문화예술 362호에 실린 Able Art라는 제목의 특집 장애인 예술의 장애는 무었인가?’에 실린 장애인 예술 창작에 대한 좌담에서 시각 장애인인 김정호 씨의 이야기 중 일부를 소개한다. 김정호씨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으며 본인이 시각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장애인 복지관에서 사회재활 팀장을 지냈으며, 시각장애인 전문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했고 그 회사의 마케팅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정호 씨와 김월식 작가는 경기문화재단의 말로 보는 미술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두 번 만나 함께 전시를 관람한 인연이 있는데 김정호 씨의 경우 시각 장애인이면서도 매우 시각적 작업을 선호한다는 것이 특별한 인상으로 남는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실재 백남준 아트센터에서의 많은 미디어 아트 작업에서는 다소 시니컬한 태도로 작업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공연 예술과 미디어 아트 보다는 순수 회화의 그 정신과 조형성에 대한 매력에 대하여 자신의 관심을 표명하며 미적 태도의 취향을 드러냈다. 특히 경기도 박물관에서 근대 이전의 영정과 초상, 민화, 한국화적 기법의 기록물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의 해박한 역사 지식에 김월식 작가의 객관적 서술이 맞물려 한 작품을 한 시간씩 관람하는 매니아적 작품 감상의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김월식 작가의 감상관점은 너무 사변적인 것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고 작품을 읽지 말고 느끼라는 충고도 해 주었다. 대한민국 예술가 이자 나름 작업에 대한 자기 철학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김월식 작가에게 당시 김정호 씨의 충고는 미술계 안팎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진정성 있는 충고였고 김월식 작가는 이후 감성에 대한 개인적 문제의식을 해체하는데 그의 이야기가 단초가 되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김정호 씨의 경우 위 좌담에서 장애인들을 편견 없이 대하고 바라보자는 장애인들에 대한 문화 복지의 일반적인 접근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장애 그 자체를 인정하는 프레임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장애인들에게 오히려 편견을 가져달라는 이 주장은 어찌 들으면 장애인들을 바라보거나 대하는 사회의 편견 없는 시선이 틀렸다는 주장과 일치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시각 장애인이자 한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온 본인의 경험을 통하여 편견 없다는 말의 허울을 벗겨내는 속내이기도 한 것 같다. 그의 이러한 이야기는 편견 없다는 이미 편견이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이미 존재한 편견의 위계 때문에 발생되는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접근방식의 획일화된 도덕적 채무들이 매우 불편하게 다가왔고, 편견보다 중요한 것이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라는 인간의 기본적 윤리감을 환기시키는 발언이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흔하게 마주보는 사람들은 마르거나 뚱뚱하고 키가 작거나 키가 크고 피부색이 어둡거나 창백하기도 하다. 그 안에서의 장애인은 그런 다른 종의 다양한 사람들 중 하나로 봐달라는 이야기와도 비슷한 그의 주장은 불편의 존재는 외적 다름이 아니라 내적 차이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의 반증일 수도 있고 그의 삶의 과정 중 고민과 사유에서 고도로 필터링된 삶의 철학 일 수 도 있다. 사실 편견의 유무가 중요하다는 이원론이 아니라 더불어 같이 살아야 된다는 주장이기도 한 김정호 씨의 말은 장애를 장애, 비장애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의 한 축 중 하나로 보자는 의미이기도 한 듯하다.

    

                                                'The Tanning', 히로코상과의 작업 후 잡초를 팔에 접착시켜 테닝을 한 김월식의 작업

 

1120일의 총체적난 극은 우리의 모임이 어떤 목적성을 갖고 있었음을 진지하게 고백하는 날이었다. 모임 초반부터 우리의 모임이 공연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시작된 프로젝트이지만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인지력들이 모두 다른 만큼 공연이 될 수도 있다는 예측과 목적성들이 그 누구에게도 중요한 사실이 되지는 않았다. 단지 이 프로젝트를 기획당시부터 주관했던 김월식 작가의 경우는 문화바우처 기획 발굴 사업으로 시작된 총체적난 극의 재원을 담당한 경기문화재단과 이를 주관한 경기도 미술관의 입장을 모두 아우르며 총체적난 극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존재했다. 물론 총체적난 극의 방향과 기대치를 설정하고 모두를 설득하며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쉽을 만들면서 일을 추진해 나갔지만 여러 사정상 처음 모임을 시작한 시기가 9월을 넘겨서야 가능했기 때문에 무언가 시간에 쫒기는 듯한 느낌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었던 김월식 작가는 처음의 기획대로 이 프로젝트를 자연스럽게 진행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조급함을 떨쳐내야 하는 지혜가 필요했다. 때문에 우리의 모임이 어떤 목적성을 갖고 시작했고 우리가 앞으로 진행해야 할 작업을 모든 구성원들이 인지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한 김월식 작가는 모임 서두에서 이 사실을 구성원 모두에게 전달한다. 옅은 환호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최근 몇 주는 단체 활동보다 작가들과 개인적으로 가볍고 사사로운 시간을 보냈던 모임의 성격처럼 작가들은 개별적으로 한명 내지는 두명의 친구들과 미술관 곳곳으로 자리를 옮겨 평소처럼 담소를 나누며 우리가 공연을 하게 되었음을, 하게 될 수도 있음을, 꼭 공연을 하지 않아도 됨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여느 때처럼 미술관 모임에서의 특별한 예능적 재능 외에 집에서나 복지관에서 또 혼자 있을 때 즐겁게 잘 하고 좋아하는 일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다.

    

친구들이 모임에 왔을 때 사소한 분쟁도 있어 보이고, 또 서로 에게 장난도 잘 걸며 즐겁게 놀기도 하며,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친구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행동들을 보면서 특별하게 장애를 판단할 수 있는 요인들을 발견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물론 석원씨의 무력감이랄까 날씨에 민감한 숙자씨의 컨디션등이 유독 불편해 보이는 적이 있기도 하지만, 미술관과 복지관 탁구 동아리를 오가며 일주일에 두 번 씩 친구들과 만나는 몇 명의 작가들에게 친구들의 장애적 요소는 처음보다 많이 둔감하게 인식 되는 것이 사실이다. 긴장감과 조심스러움 보다는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관계와 신뢰감이 형성될 수 있을까 하는 초반의 우려는 어느 정도 해소 되었다고 할까? 하지만 이 둔감함이 우리 모두의 내일에 긍정적 신호가 되어 줄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저 친구들의 장애적 요소들이 크게 다가온 초반보다 인간적 친근감으로 서로에게 다가가기가 자연스러워지고 사소한 담소와 개인적인 이야기도 가능한 관계와 과정이 총체적난 극에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질문이 따라오는 것은 모든 상황과 과정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어야 될 것 같은 강박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지금 우리는,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김월식 작가는 총체적난 극의 한 가운데서 방황하는 자신을 목도한다.

 

김월식 작가의 경우 크게 두 가지의 질문에 반응한다. 아마도 이 질문은 총체적난 극이 기획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고, 매번 모임의 과정에서 확인되고 이 프로젝트가 끝나는 지점까지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는 프로젝트가 끝나도 일련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구할 수 있을지 그 역시 의문이다. 무언가 느낄 수는 있어도 선명해지지 않는 이 불확정성들의 진단은 일단 유보한다. 질문의 하나, 과연 이 총체적난 극의 과정으로 장애인들과 예술가들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질문 하나, 총체적난 극의 텍스트성이 문화복지의 성과주의적 프레임을 다른 진정성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이는 비단 이번 프로젝트에 국한 된 질문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유독 이 질문들이 지속적으로 김월식 작가에게 던져지는 것은 매우 제도적인 상상력의 지배력이 김월식 작가에게 작동되는 것으로 읽힌다. 균형감 있는 디렉션은 개나 줘버리라는 충동을 억제한다. 하지만 이 균형감은 먹물들의 자기검열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니 이제 그 정체를 커밍아웃할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것도 사실이다.

 

일련의 관계가 자연스러워지자 우리에게 스케닝 되는 친구들의 모습은 더욱 인간적이다. 친구들에게는 내가 억제하는 만큼의 욕망의 자제력도 있고, 그 자제를 뚫고 나오는 모난 구석도 있다. 안 그런 척 하지만 난 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나와 의견이 같지 않은 남들을 미워하거나 배척하고, 나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이유 없이 이성의 매력에 끌려 짝사랑도하고 연애도 하며 실연도 겪는다.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 사실들이 친구들에게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개인적 이야기를 통하여 알게 된다. 무언가 남의 욕을 같이 하거나 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유대감이 우리에게 형성됨을 느낀다. 어쩌면 조금 심각할 정도로 구성원 내의 친구들을 미워하는 감정도 들리고, 불평과 불만의 소리도 들리고,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는 욕심도 드러낸다. 집에서 소일하는 시간의 나태함도, 가끔 과거를 회상하며 내가 그런 사람이였어! 하는 자랑도 들린다. 여전히 말을 건네고 답을 기다리는 사간이 한없이 흘러가기도 하고, 관심 없는 질문에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기도 하지만 총체적난 극에 선형과 비선헝의 시간이 같이 존재하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사실이 되기도 하고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총체적난 극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문화적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났는지, 그것이 삶의 성찰에 다시 작동되는 장치로 어떻게 활용할지 잘 모르는 것처럼 장애인 친구들 역시 어떤 재능과 관심으로부터 삶의 행복을 설계할 수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총체적난 극은 그런 이유로 많은 장르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며 출발하였다. 본래 예술가들은 특별한 미적 재능만큼 사고와 철학이 특별하다. 이 특별함은 다양함을 만들고 서로를 존중하지만 태생적으로 다른 미적 감수성들의 충돌은 피할 방법이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인 이 충돌은 차이와 차이가 만나는 경계를 해체하기도 한다. 이 역시 총체적난 극이 갖고 있는 예측 불허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이견이 총체적난 극에 긴장감을 더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1120일 총체적난 극의 모니터링 회의는 다른 때 보다 조금 길게, 진지하게 그 예술가의 미적 차이가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꿈을 꾸는 하나의 잠자리. 이견을 조율하기에 김월식 작가의 디렉션이 조금 더 견고하게 논리를 펼쳐 나간 듯 보이지만 이 텐션의 긴장감이 사고의 길을 마련한다. 특히 예능적 교육에 오랜 시간 자기 경험을 갖고 있고 그로 인해 획득되는 자신의 관계철학이 서로 다른 예술가들은 상대방이 왜 그런 관점을 갖고 있는가에 대하여 쉽게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월식 작가의 디렉션이 다른 예술가들의 부담감을 가중시키면 김월식 작가의 고민중 하나가 무참하게 부서지는 셈이다. 과연 이 프로젝트가 예술가와 장애인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 김월식 작가는 예술가들까지 행복한 프로젝트를 꿈꾸면서 이 다른 이견과 충돌을 어떻게 봉합할 것인가? 이견을 드러내되 절충을 싫어하는 김월식 작가 특유의 접근 방식이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작동될 것인가? 우선 예술가가 총체적난 극의 과정에서 받는 압박과 스트레스가 예술적 자율성을 훼손 한다면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 때문에 창의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기조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예술가들의 창의적 상상력은 총체적난 극의 유연한 장치이자 잠재태적 설정이다. 동상이몽, 어쩌면 리좀의 상상력을 기대하며 뿌리가 없는 입체적 병렬구조의 과정과 극을 생각했던 총체적난 극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에피소드로 오늘의 충돌을 필요로 바꾸어 본다. 다르면 다른 데로 갈등은 갈등 데로 차이는 차이 데로 보여주자는 취지는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한 가지, 우리의 예술적 상상력이 새로운 가치의 지점을 향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고의 관성이라면 이는 더 격렬한 차이의 드러냄이 필요하다. 차이의 끝을 보지 않고 서둘러 봉합하는 것은 총체적난 극을 그저 그런 절충의 미학으로 끌고 가는 치사함이다.

    

어떤 마임 연기자가 아무리 열심히 침묵의 세계를 연습한들, 24시간 단 1초도 빼지 않고 트레이닝하는 청각 장애인들을 따라갈 수는 없죠. 학예회 수준이 아니어야 하겠지만, 뭐 학예회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나쁠 건 없다고 봅니다. 학예회도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뭐냐면, 흉내 내기 하기를 시작하면 항상 거기서 망한다는 거예요. 비장애가 장애를 흉내내도 마찬가지죠. 제가 매튜 바니를 좋아하면서도 반감을 가진 부분이 그것이었어요. 그 사람은 미식축구를 할 정도로 아주 건장한, 사지육신이 멀쩡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구속의드로잉이라면서 자신의 몸을 묶고 벽에 매달려 그림을 그렸다는 거예요. 그럴 것이 없이 경추가 한번 나가주면 깨끗하겠죠. 아주 일시적인, 거기서 내려오는 순간 해방되는 구속의 경험과 영원히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신체적 구속은 그 의미가 정말 다르죠. 그래서 매튜 바니에게 메일도 한 통 썼습니다. 깁스라도 하나 하라고”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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